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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25전쟁 67주년 좌파 우파 갈등의 시작 (좌익 우익이란?)

숲속의 움비 2017. 6. 2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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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내일이 6.25 전쟁 67주년을 맞이해서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6.25라고 하면 1950년도 새벽 4시에 북한이 남침했고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면서 압록강까지 이르렀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3.8선 부근에서 계속 전투가 벌어지다
휴전 협상이 51년부터 시작해 53년에 휴전협정을 맺었는데요.
여기까지는 다들 아시지만   광복 이후부터 전쟁까지 
가게 된 이유를 아냐고 물어보면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제가 이런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1945년 라디오로 들려오는 잡음 섞인 희미한 소리로 '일왕 히로히토'
모든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나라를 뺏긴 지 34년 11개월 만에 일이었다.
이때 당시 방송을 들은 대중들도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어서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사태를 파악했다고 한다.
밭을 갈던 농민들도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분들도 
심지어 친일부역자들도 뛰쳐나와 만세를 외쳤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는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겐 광복의 희망이었고 일본의 지배에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기회를 한 자 들은 누군가를 죽이기 시작했으며
희망을 가진 자들은 앞으로의 변화를 기대를 했고
두려움을 느낀 자들은 상황을 살폈다.





이때 친일파를 포함해 애꿎은 일본인들도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여운형과의 접촉으로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부탁했다.
이는 다시 말해 자국민의 안전한 귀국도 보장하지 못할 만큼 얼마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인지   있었습니다.

이때 여운형은 일본에게 일본에 붙잡혀있는 정치범 즉시 석방 3개월간 식량 확보 
자주적인 치안유지, 건국을 위한 정치운동 간섭 불가 등등의 조건을 제시했으며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조선은 해방되었으나 행정시스템과 같은 정치적인 상황이 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여운형은 좌익과 우익의 합작 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 준비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주적으로 이뤄낸 독립이 아닌 세계열강들의 패권다툼으로 이뤄낸 광복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나라 재건을 위해 모인 그들은 점차  본질과 정치성향이 변질되었다.
박헌영의 좌파세력이 득세를 하게 됩니다. 이에 우파세력이 건준을 나오게 되었다.
이때 한반도는 좌, 우가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좌든 우든 사상이 나쁘지 않았고 그들마다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고 
그들마다 서로 계획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걸 올바르게 이행하지 못 한 사람이 나빴던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대중들이 이런 사상 싸움에 가장 큰피해자가 됩니다. 




1945년 9월 맥아더장군이 맥아더 포고령 제 1호가 발령되었습니다 . 

그 내용은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 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항복은 우 제국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것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준수가 필요하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항을 발표한다.

  •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 제3조 -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 제4조 -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 제5조 -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 제6조 - 추후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하겠다고 발표를 하였고
그의 포고령은 아직까지도 말이 많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제도나 관공서 주요 관공서 등을 그대로 유지해야 했고
그로 인해 과거 요직을 맡았던 친일파들이 다시 대거 등용되었다.
대한민국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그들의 잘못이었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첫 번째 이유이다.



미국 군정들은 조선인의 슬픔을 알지 못했고 그들이  조선은 테러가 난무하고 질병과 기아에 속수무책이던 
더러운 빈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친일파들은 무언가 배운 사람이란 이미지가 있었고
그들은 너무나도 미군의 비위를 잘 맞췄다.
세상은 바뀌어도 그들은 잘 먹고 잘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방해되는 자들을 공산주의자 반정부주의자 모순되게도
친일파(?)라 몰아세웠다.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다른 죄를 지어야만 살아갈  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우리 조선인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자들이 자신들을 괴롭혔던 자들과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드는 모습들을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우리 국민들은 새나라를 이끌어줄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우남과 백범이 차례로 귀국했다.




우남 이승만은 미국 조지 워싱턴,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프리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상하이 임시정부 최고 적임자로 추대받으며
미국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설립한 인물
그러나 안창호와의 대립과 독립자금을 횡령했던 인물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됐다.





그때 당시 그의 명성은 그의 과거를 덮을  있었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영향력 있는 정당이 되기 위해서
이승만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미군은 이런 이승만을 곁에 두면서 남한의 좌파세력을 몰아내려 했고
이를 통해서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계기가 됩니다.
 두 사건은 제가 나중에  사건을 포스팅하고 싶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백범 김구 한인애국단을 창설 이봉창 윤봉길  많은 의거를 지휘하였으며,
해방 후 임시정부를 거부하는 미군정으로부터 견제를 받아서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의 
귀국이 불허되고, 한참 뒤에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김립 피살사건, 치하포 사건, 백색테러 등으로 논란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구의 명성 또한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추구하는 방향과 미군정이 추구하는 방향이 맞지 않아
김구 선생이 하는 일마다 항상 미군정의 견제를 받게 되고
그렇게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함께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를 결성하여
대한민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해 최우까지 싸울 것을 선 헌 하였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선생이 함께하게  계기  하나였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개최됩니다.
한반도의 독립 문제에 관해 논의한 회의로 
교과서에선 신탁통치로 알려진 회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끝나갈 무렵 이미 연합군은 전후에 벌어지게  문제들을 수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카이로 회담을 열었고  회담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한 후에 
한국을 적당한 시기까지 신탁 통치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부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고  회의가 바로 모스크바 3상 회의입니다.





그러던 1945년 12월 27일,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신문사들로부터 오보된 초특급 대형 사건.

그리고 한반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만들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이자 분기점이고 
해방 이후 한반도의 모든 비극적인 역사는 이 오보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한반도의 분단이 외부적인 이유와 내부적인 이유가 뒤섞인 것도 이 오보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 오보사건이 한국의 현대사를 뒤바꿀 정도로 너무나도 기가 막힌 사건이다.

대표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후술할 '남한 우파/미군정 배후설'과 '북한 좌파/소군정 배후설'이 있다. 


그 이후의 내용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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